죽으면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주세요 / 1985.2 가수 김정호 / 내가

제가 죽으면 절대 굽지 말고 묻어주세요 전망이 좋은 양지 언덕에 묻어주세요.

가수 김정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그의 유언대로 금촌공원묘지의 양지바른 앞이 트인 언덕에 그를 묻었던 날 까치가 한마리 날아와 울었는지 노래인지 모르게 잠시 까칠까칠했다고 한다.

마침 김정호와 친형제처럼 안에는 이상기(구창모의 매니저)가 그 까치를 보았다.

아마 김정호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고인이 부탁한 대로 장례를 치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온 것 같았습니다.

이상기 씨가 평소 친동생처럼 보던 김정호여서 아마 흔한 까치 울음소리조차 그의 영혼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된 김정호는 타고난 가수였다. 겨우 서른이 넘어 이른 나이에 이른 한 많은 남자 김정호의 노래 한 곡밖에 모르는 외로운 삶을 살다가 아무 욕심 없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의 이름은 조영호 195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교동국민학교를 나왔다. 아마 음악을 하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그 밖의 집에는 오래전부터 두각을 나타낸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그의 몸에 밴 음악생활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외할아버지 박동신씨는 당대 꽤 알려진 국악인이며, 김정호의 어머니 박수자씨도 국악을 하셨다고 한다. 삼촌은 국악기 연주자로 아쟁을 다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정호의 노래는 끊기듯 이어지는 한 많은 원망스러운 가야금 소리와도 같고, 강한 판소리와도 같아 듣는 우리 가슴 한구석에 깔린 슬픔을 달래주는 것이다.

눈이 크고 키가 작은 그의 체격처럼 어려서부터 약골로 자랐지만 국민학교 시절에는 작문을 하면서 연극을 잘하는 아이였다. 그는 집에서 늘 들어온 국악의 선율과 타고난 감수성 때문인지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기타를 만졌다. 그의 친구가 기타 치는 모습을 우연히 본 게 계기가 됐고, 그날부터 그 신기하고 매력적인 기타를 얻기 위해 할머니를 졸랐어야 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운 것은 3년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기타의 매력을 알게 된 뒤부터는 밥도 자지 않고 기타를 쳤을 정도라고 한다.

또 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처럼 여행을 즐겼다. 몰래 무일푼으로 무선여행을 떠나거나 그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글로 남기기도 했는데 바로 그때 여행을 하면서 만든 노래가 오니언즈가 불러 히트한 사랑의 진실이라는 노래다.

김정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정식으로 가요 활동을 하기 위해 밤무대에 섰다. 미8군 클럽과 미군부대 주변에 기지촌 클럽이 거의 그가 선 무대였다. 그룹 사운드를 조직해 퍼스트 기타를 치고 싱어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을 상대하는 무대란 언제나 영어 팝송을 불러야 한다는 점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는 남의 노래나 흉내 내는 앵무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바로 그만두었다.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한국어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가 죽으면 절대 굽지 말고 묻어주세요 전망이 좋은 양지 언덕에 묻어주세요.

가수 김정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그의 유언대로 금촌공원묘지의 양지바른 앞이 트인 언덕에 그를 묻었던 날 까치가 한마리 날아와 울었는지 노래인지 모르게 잠시 까칠까칠했다고 한다.

마침 김정호와 친형제처럼 안에는 이상기(구창모의 매니저)가 그 까치를 보았다.

아마 김정호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고인이 부탁한 대로 장례를 치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온 것 같았습니다.

이상기 씨가 평소 친동생처럼 보던 김정호여서 아마 흔한 까치 울음소리조차 그의 영혼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된 김정호는 타고난 가수였다. 겨우 서른이 넘어 이른 나이에 이른 한 많은 남자 김정호의 노래 한 곡밖에 모르는 외로운 삶을 살다가 아무 욕심 없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의 이름은 조영호 1952년 서울 토박이로 태어나 교동국민학교를 나왔다. 아마 음악을 하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그 밖의 집에는 오래전부터 두각을 나타낸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그의 몸에 밴 음악생활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외할아버지 박동신씨는 당대 꽤 알려진 국악인이며, 김정호의 어머니 박수자씨도 국악을 하셨다고 한다. 삼촌은 국악기 연주자로 아쟁을 다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정호의 노래는 끊기듯 이어지는 한 많은 원망스러운 가야금 소리와도 같고, 강한 판소리와도 같아 듣는 우리 가슴 한구석에 깔린 슬픔을 달래주는 것이다.

눈이 크고 키가 작은 그의 체격처럼 어려서부터 약골로 자랐지만 국민학교 시절에는 작문을 하면서 연극을 잘하는 아이였다. 그는 집에서 늘 들어온 국악의 선율과 타고난 감수성 때문인지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기타를 만졌다. 그의 친구가 기타 치는 모습을 우연히 본 게 계기가 됐고, 그날부터 그 신기하고 매력적인 기타를 얻기 위해 할머니를 졸랐어야 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운 것은 3년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기타의 매력을 알게 된 뒤부터는 밥도 자지 않고 기타를 쳤을 정도라고 한다.

또 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처럼 여행을 즐겼다. 몰래 무일푼으로 무선여행을 떠나거나 그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글로 남기기도 했는데 바로 그때 여행을 하면서 만든 노래가 오니언즈가 불러 히트한 사랑의 진실이라는 노래다.

김정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정식으로 가요 활동을 하기 위해 밤무대에 섰다. 미8군 클럽과 미군부대 주변에 기지촌 클럽이 거의 그가 선 무대였다. 그룹 사운드를 조직해 퍼스트 기타를 치고 싱어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을 상대하는 무대란 언제나 영어 팝송을 불러야 한다는 점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는 남의 노래나 흉내 내는 앵무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바로 그만두었다.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한국어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73년도에 가수로 출연했고 76년 1월 1일 아직 상처가 남지 않은 가요계의 상처 대마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대마초를 피운 연예인들은 가수도 배우도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래서 음악만 믿고 살던 김정은 정신병원에 가야 하는 참담한 고통을 받았다. 음악 속에서 살면서 슬픔도 아픔도 괴로움도 조금씩 잊혀진 그에게 음악이 없어지면 결국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모두 사는 것인가. 음악을 잃고 몸부림치던 그에게 따뜻한 한 줄기 빛이 찾아온 사랑이라는 이름의 손이었다.

교동국민학교 동창이기도 한 동갑내기 이영희 씨를 만나 76년 결혼한 것이다. ” 저는 음악 하나밖에 모르지만 음악보다 더 사랑하는 게 영희 씨라고 고백했다.

그가 정말 죽음을 앞두고 꿋꿋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짐작할 수 있다. 무대를 빼앗기면 돈벌이도 넉넉하지 않은 그의 생활은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그 힘든 상황에서 태어난 쌍둥이 딸 존슨 정훈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고 한다.

셋집을 내면서도 딸들의 장난기에 노래할 수 없는 고통이나 육체적인 아픔은 오히려 재미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 보면 해처럼 공평하고 무관심한 것도 없는 76년 발이 묶인 대마 가수들이 스스럼없이 지낸 3년 만에 79년 12월 28일 다시 활동을 해도 된다는 허가가 있었던 것이다.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린 사람이 바로 가수 김정호였다. 새로운 마음으로 음반 도입을 서두르며 다시는 노래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 되더라도 노래를 못하는 가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마음처럼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그의 가슴속 병은 깊어졌고 폐병이라는 병마는 쉽사리 물러설 수 없었다. 1980년에는 인천결핵요양원에 입원했다가 5개월 만에 도망쳤다. 육체의 안정을 위해 노래할 수 없는 새장의 새가 될 수 없었다.

병원에서 몇 달간 쉰 덕분에 목소리도 많이 높아졌다.81년 3월에는 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신곡을 취입하려고 다시 준비를 했다. 김정호의 모든 노래는 입으로 부르기보다 가슴에 응어리의 한을 풀 듯 진한 노래가 많다. 자연스럽게 노래 후 호흡이 힘들어 겨우 한 구절을 부르고 한 구절을 더 불러야 할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

인천 결핵요양원에 있을 때는 면회를 온 아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만든 외로운 여성의 미소는 슬프다는 노래를 들으면 아내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 수 있다. 겨우 다시 꽃을 피우려던 김정호 씨는 비록 떠났지만 그의 원한의 피를 토하는 노래는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그는 어렵게 살면서도 돈이 생기면 원로 가수를 찾아 생활이 어려운 이들 몰래 쌀가마니를 두고 가기로 했다. 또 개그맨 송영길 등 몇 명이 신촌역 일대 사글세방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전세금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도움을 받은 주민들조차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철저히 숨어 남을 도왔다고 한다.

김정호가 죽기 보름 전 DJ 이종환 씨를 찾아가 형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하자 몸조심하고 나서 하라며 돌려준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이종환 씨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그의 가장 친한 하남석은 그의 병상을 떠나지 않았고 김종회의 마지막이 되어버린 외로운 여자의 슬픔을 편곡한 김명곤도 음악만을 사랑하는 음악가 김정호를 위해 장례를 도왔다.가수 김정호가 1985년 11월 29일 세상을 떠나기 전 인터뷰한 거의 마지막 인터뷰가 아닐까 하는 자료다.1…blo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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